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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카터 (Coach Carter, 2005)

 

감독 : 토마스 카터

관객수 : 65,123

사무엘 L. 잭슨 (코치 카터)

 

 

 처음 이 영화를 접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체육선생님이 보여주실 때는 흥미롭지도 않았고 당연히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 소년들에게 아무리 명작이라 할지라도 감동적이기는 참으로 힘들다. 처음 영화를 접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영화의 의미와 교훈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줄거리

 

주인공인 코치 카터는 리치몬드 고교 농구부의 전설적인 선수였다. 득점, 어시스트, 스틸 부문에서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도 그 아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리치몬드 고교 농구부의 코치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록과 전설은 사춘기 소년들에게 빛 바랜 과거에 불과했다. 선수들은 코치가 뭐라 하건 무시하고, 훈련에도 참여하지 않고, 학교 수업은 당연히 출석하지 않는 비행 청소년들이었다. 새로 부임한 코치 카터와의 불꽃 튀는 첫 만남은 예상되는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카터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농구 코치로 부임했지만 선수들이 제대로 된 학생이 되고, 대학교에 진학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랬다. 농구 선수이기 전에 학생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했고, 학점, 기본적인 행실 등에 관한 계약서를 작성한다. 이 과정에서 반항기가 누구보다 가득했던 크루즈가 이탈하게 된다.   

 

The losing stops now. Starting today, you will play like winners, act like winners, and most importantly, you will be winners.

Winning in here is key to winning out there.

 

                           

 

몇몇 선수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하나의 팀을 만들었고, 작년에 4 22패에 그쳤던 팀을 연승가도에 올려놓는다. 이에 크루즈는 다시금 팀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절했다.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양의 팔굽혀 펴기와 왕복달리기를 해야 내야만 했다. 크루즈가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도 카터는 계속해서 그를 자극한다.

 

What is your deepest fear? That’s you’re inadequate? Give up. Go home

 

크루즈 혼자서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동료 선수들의 도움으로 팀의 일원이 된다. 팀은 계속해서 성장했고 연승을 거듭해 나갔다. 약팀으로 전전했던 리치몬드 고교가 초청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그들은 농구팀으로서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학생 신분으로는 최악이었다. 여전히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낙제점을 받았다. 선수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적어도 최소한의 학업에 충실함으로써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랐던 카터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농구에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한 것이다. 체육관은 쇠사슬로 걸어 잠갔으며, 연습과 경기를 모두 취소했다. 선수들 모두 평균 2.3 학점을 달성할 때까지 말이다.

 

             

 

카터의 결정은 리치몬드 지역사회에 큰 충격과 혼란으로 다가왔다. 학업, 대학, 학교와는 항상 멀다고 느꼈던 학생들이 열심히 농구하고 즐기는 것만으로 부모들은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대학을 가든 못 가든 적어도 고교 시절 농구부로서 최선을 다하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행복한 추억을 쌓는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심지어 리치몬드 고교의 교장 역시 카터에게 항의한다.

 

Mr. Cater. Both you and I know that for some of these kids, this basketball season will be the highlight of their lives.

Well, I think that’s the problem. Don’t you?

 

 그러나 카터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농구 한 게임 이기는 것만을 중요시하는 기성사회의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이미 선수들을 실패한 학생으로 몰아가고, 졸업은 당연히 기대하지도 않으며, 그들이 대학에 갈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우리의 편견이 그들의 더욱 망치는 것이며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You painted an extreme picture. No one expects them to graduate, no one expects them to go to college.

 

 카터의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체육관 개방을 안건으로 하는 위원회가 소집된다. 카터의 진실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방청객들은 여전히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위원회의 결정도 마찬가지였다. 카터는 위원회가 체육관 개방을 결정한 이상, 자신은 더 이상 코치직을 수행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위원회의 잘못된 결정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코치직을 내려놓겠다고 말하며 짐을 정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체육관을 찾아간다. 

 

You really need to consider the message that you’re sending these boys. It’s the same message that we as a culture send to our pro athletes, which is that they are above the law. Now, I’m trying to teach these boys the discipline that will inform their lives and give them choices. If you endorse the fact that 15, 16 and 17 – year – olds don’t have to honor the simple rules of a basketball contract, how long do you think it will be before they’re out there breaking laws? Now, I played basketball at Richmond 30 years ago. It was the same thing then. Some of my teammates ended up in prison. Some of them ended up dead. I took this job because I wanted to effect change in a special group of young men, and this is the only way I know how to do that. If you vote to end the lockout, you won’t have to terminate me. I’ll quit.

 

 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체육관은 개방했지만, 카터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선수들이 카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체육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반항기가 심했던 크루즈는 카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Our deepest fear is not that we are inadequate. Our deepest fear is that we are powerful beyond measure. It is our light, not our darkness, that most frightens us. Your playing small does not serve the world. There is nothing enlightened about shrinking so that other people won’t feel insecure around you. We were all meant to shine, as children do. It’s not just in some of us, it’s in everyone. And as we let our own light shine, we unconsciously give other people permission to do the same. As we are liberated from our own fear, our presence automatically liberates others.  

 

                   

 

 학생들의 결정에 감동받은 카터는 계속해서 코치직을 수행하고, 결국 모든 학생이 평균 2.3 학점을 달성한다. 리치몬드 농구부는 다시금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고 주 토너먼트 대회에도 초청되는 쾌거를 누린다. 1차전 상대는 주 1위로 꼽히는 팀이었다. 불리한 전력, 어웨이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리치몬드 고교는 끝까지 추격했다. 아쉽게 상대팀 에이스의 버저비터로 결국 패배하지만, 그들은 패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반항기 가득한 소년들의 농구 이야기도 막을 내린다.

 

What you achieved goes way beyond the win-loss column or what’s gonna be written on the front page of the sports section tomorrow. You’ve achieved something that some people spend their whole lives trying to find. What you achieved is that ever-elusive victory within. And gentlemen, I am so proud of you.

 

                       

 

 

2.   감상

 

-      선수이기 이전에 학생, 그리고 인간

 

 코치 카터는 흥미 유발을 위한 기분전환용 스포츠 영화가 아님에는 분명하다. 그들이 농구 한 경기를 이기기 위해 왕복 달리기, 팔굽혀펴기, 다양한 전략을 준비했다는 것은 요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점은 농구 선수가 아니라 한 명의 학생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으며, 학생이 되어야겠다는 선택이 그들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또한 선수이기 이전에 학생으로 바라볼 줄 아는 감독이 필요함을 강조한 영화이기도 하다.

 

 필자의 고등학교에는 프로 축구 선수를 준비하는 축구팀이 있었고, 각 반에 적어도 한 명씩은 선수들이 속해있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누구도 그들에게 학업에 충실할 것을,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직 축구 하나에만 집중하길 바랐다. 올바른 인간, 학생이 되기 이전에 축구부터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선수도 하나의 인간이고 학생이다. 무엇보다도 선수이기 이전에 학생이었고, 그 이전에 인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학생으로서 최소한의 공부를 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면서 살아가는지는 잘 모른다.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축구선수로는 실패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얼 할 수 있는가? 최소한의 교육조차 받지 못한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곳에 속할 수 있으며, 어떤 대우를 받겠는가?

 

 그나마 긍정적인 사실은 한국도 주말 리그제를 시행하여 고등학교 선수들이 학업에 충실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과거의 것과 다를 바 없다. 체육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다른 학생들에 비해 무식하다고 보는 우리의 편견은 변하지 않았다. 주말 리그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운동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맨 뒷줄에 앉아 수업 시간 내내 자는 상황은 변함이 없다. 제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제도에 우리의 인식이 담겨야만 한다. 체육인들도 우리와 같이 충분히 똑똑하며, 꼭 체육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어야만 한다. 고교 시절 잘하고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친 편식은 건강을 해치기 마련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최소한의 학업은 마쳐야 한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더 중요하게는 한 명의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말이다.    

 

 

-      위원회 문화

 

 중심적인 내용과는 관련 없지만 미국의 위원회 문화도 인상 깊었다. 비록 위원회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위원회 자체의 기능과 작동은 진정한 민주주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학창시절 우리의 학교에도 위원회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 중 위원회에 참여해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위원회가 언제 열리는지 제대로 알고 있던 사람은? 학부모로서 위원회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의 위원회는 보다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소수에 의해 다수가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소수의 권력자들이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실제 미국의 위원회 문화가 어떤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한 한 편의 영화를 가지고 그들의 위원회 문화의 전면을 들여다봤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다만 적어도 코치 카터에서 그리고 있는 위원회의 모습은 선생님, 코치, 코치의 부인, 학생들, 학부모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이었다. 소수의 대표들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의견을 공유하고 여론을 반영할 수 있도록 민주적인 절차들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영화에 담긴 위원회의 장면은 대부분의 미국 자치 위원회가 이와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문화이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런 장면이 영화에 담긴 것은 아닐까.

 

 자치라는 단어 자체가 소멸될 위기에 놓인 한국은 이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소수가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경멸하고 비판하고 무관심으로 대응하기 이전에 무능한 다수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적어도 최소한의 의사표명을 해야 하며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들의 경제력, 사회적 지위가 낮다 하더라도 코치 카터에서 보았듯이 다수로 뭉칠 경우 의견은 반영된다. 적어도 저들은 자치는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터의 독단적인 행동에 비판할 자격과 권리가 있는 것이고, 비록 부분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

 

 NBA, MLB, EPL을 볼 때마다 항상 부러웠던 것이 있다. 바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충성심 있는 팬층과 이러한 지역 팬들에 대한 선수들의 충성과 열정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야구에 있어서는 그러한 지역 팬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응원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며 재미있는 볼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KBL, K-리그을 비롯한 여타 스포츠의 경우 지역 팬덤은 고사하고 응원 문화, 팀 연고에 대한 자긍심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난 필자는 축구를 좋아하지만 FC서울, 서울삼성썬더스에 속한 선수들을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의 경기장을 찾은 기억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선수들은 어떠한가. 서울을 연고로 한 팀이라고 해서 서울 출생인 선수가 주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 팀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보니 선수들 역시 지역 이름을 호명하면서 응원을 유발하거나 그런 식의 발언을 하지도 않는다. 관중과 선수 모두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지역을 기반으로 한 팬층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울 출생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이 없다고 느낄 것이기에 그러한 안타까움을 공유하고자 한 것이다. 매년 뒤바뀌고, 태어난 곳은 이미 허물어져 사라졌고, 모든 것이 변해버린 공간에서 더 이상 애착을 느끼기 힘들다. 우리의 추억이 담긴 시공간은 사라졌고 파괴되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을 서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약간은 어색할 정도니 말이다. 자신의 연고를 부르짖으며 이웃과 소통하고 한 팀으로 성장하는 리치몬드 고교의 학생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Rich what? Richmond!

Where we from? Richmond!

What’s my hometown? Richmond!

What we love? Richmond!

 

 

-      What is your deepest fear, young man?

 

 카터가 반항아 크루즈에게 계속해서 내뱉은 문장이다. 직역하면 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냐?’ 정도가 되겠다. 크루즈의 대답은 위에서 소개한 바 있다. 크루즈라는 인물은 우리의 소년기를 대표한다. 뿐만 아니라 사춘기 이후에도 방황하는 청춘들을 표현하기에 크루즈만큼 적절한 인물은 없을 듯하다.

 

 크루즈는 자신의 무능력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품고 있는 긍정적인 빛을 두려워했다고 고백한다. 일종의 언어유희처럼 들리기도 한다. 긍정적인 빛을 내뿜고 나를 해방시킴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 해방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인데, 이는 동시에 자신이 빛을 내뿜지 않고 무능력하기 침전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려운 것은 빛이라고 말했던 데에는 모든 사람이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 가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다. 다만 자신이 그러한 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고 두려워서 무능력을 택하는 것이다. 내재된 나만의 빛이 성공한 사람들로 요약되는 사람들의 것처럼 사회에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한 두려움에 휩싸여 빛을 감추고 몸을 어둠으로 휘감는다.

 

 대부분의 사춘기 문제아들, 자신을 실패자로 부르는 청년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크루즈와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스스로를 희망 없는 놈, 악으로 가득 찬 사람, 능력 부족, 긍정적인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으로 일축한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또한 우리는 빛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빛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우리의 빛이 서로의 길을 밝히고, 인도할 때 우리는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