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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유대인이었던 한 사람이 수용소에서 겪어야만 했던 일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단순히 수용소에서의 참혹한 경험과 현상들을 나열하고자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나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열된 책도 아니다. 이 책이 그렇게 구성되었다면 결코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부에서는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인간성이 처절하게 파괴되는 수용소에서조차 삶은 여전히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부와 3부에서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에 보다 이론적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직접 창시한 로고테라피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해석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개념을 강화해 나간다. 또한 로고테라피를 통해 많은 환자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했던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삶에 희망의 불빛을 선사하고자 했다.   

 

1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필자가 읽고 느낀 바를 전하자면 저자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개인의 삶에 대한 의지를 강조하고자 했다.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처한 환경은 영향력이 큰 변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원효대사의 해골물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따라 그것은 신선한 이슬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있다는 것이다. (중략)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120~121)

 

 다시 말하자면, 수용소라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빼앗기지 않았음에도, 마치 모든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좌절하고 과거에 젖어 사는 사람은 결코 살아남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겪을 수 있었던 최악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간단하고 명백한 진리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다만 마음 먹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저자는 삶의 목적과 의지를 잃은 사람들의 유형 중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는 사람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다가는 과거의 업적조차 무너뜨리는 날을 맞게 된다. 과거에 몰두하는 순간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필자도 경험했지만,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유독 심하게 앓는 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라는 교육열이 뜨거운 국가에서 태어난 우리는 초중고 시절 내내 학원을 다니며 학업을 불태웠다. 그렇게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면 마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한 착각에 빠지고,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오만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늪에 빠져 보통 1년 정도는 허비하는 것 같다. 대학생이라는 특정 케이스를 소개했지만, 우리 사화에 만연한 현상이다. ‘나때충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니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나때충이 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특히 시시각각 변하고 진화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과거의 안락함에 매몰되고 보수적인 사고방식만을 유지하는 것은 스스로의 목을 옭아매는 것과 같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130)

 

 저자가 말한 것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 과거에 매몰되면 안 된다는 것을 누가 몰라서 못하는가?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삶을 좀먹는 방식들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저자는 여러 해결책이나 사례들을 제시하지만 필자가 무엇보다 깊이 공감했던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여전히 더 말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77~78)

 

바로 사랑의 감정이.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대상이, 목표가 있다면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수용소에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생사도 알 수 없고 지켜줄 수도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살을 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해내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후일에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 그것이 바로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비록 저자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하루하루 같은 일상 속에서 쳇바퀴를 굴리며 살아왔다. 어렸을 적 꿈꾸었던 세상과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망각하고 체념하며 살아왔다. 무채색과 같은 삶에 색이 생기고, 인간냄새가 풍기기 시작한 것은 한 사람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녀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바뀌고 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지식적인 측면에서 깊어졌다는 느낌보다는 한 사람으로서 성숙해지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녀와 보내는 행복한 하루하루가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되어버렸다는 표현보다는 되어주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 하다. 끝없는 좌절과 체념의 늪에서 꺼내주었으니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다. 누군가는 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삶의 원동력으로써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우리가 흔히 정신적인 가치가 물질적인 가치보다 고상하고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인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한 사람의 삶에 찬란한 빛을 가져오는 데에는 정해진 답이 없으리라고 믿는다. 때로는 물질적인 가치가, 때로는 정신적인 가치가 더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러 가치 사이에서 흔들리는 추는 언제든지 반대쪽으로 옮겨 갈 수도 있다. 필자는 수많은 소중한 가치들 중 사랑에서 삶의 의지를 되찾았을 뿐이다 

 

우리 모두 삶을 영위할 힘과 능력이 있다. 다만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속 강해질,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지속 가능한 개인만의 삶의 목표 설정만 가능하다면 말이다.

 

 

 

2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

 

 로고테라피는 명확한 방법론이나 공식과 같은 내용은 아니었다. 필자의 식견으로 로고테라피 이론을 규정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고자 한다. 

 

로고테라피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168)

 

위 두 문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의미 / 의지 / / 원초적 동력정도로 보인다. 재구성해 보자면 인간 삶의 의지와 원초적 동력은 삶에 있어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자세로 필자가 1부 요약에서 소개한 내용은 과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였다. 저자는 2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방법과 견지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184~185)

 

저자는 3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나, 결국은 하나의 진리를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어떤 일이나 상황을 맞닥트리더라도 피하지 말고 부딪혀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협업 혹은 분쟁을 통해서 이전에 없었던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더 좋게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시도를 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성공한 사람들은 방법을 찾지만, 실패한 사람들은 구실을 찾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페이스 북의 모토로 알려진 ‘done is better than not doing’도 같은 맥락이다. 우선 해봐야 한다. 뭐든 경험해보고 직접 느껴야 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려면 직접 해봐야 한다. 물론 직접 해보라고 해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마약에 빠지는 등 모든 사람들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실천에 옮기라는 뜻은 아니다. 독자 여러분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일까.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자아실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 이 문단을 접했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서 찾으려 할수록 우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어딘가 논리적으로 맹점이 있는 듯 느껴졌다. 자아를 찾고자 노력하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위 문단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들 자아 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찾기 위해 검사를 받기도 하고 상담가와 조언가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자아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답을 찾기가 점점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대다수는 자아 발견을 포기하고 낙담한다. 이는 우리의 편협한 사고와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발견과 실현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내적으로 깊게 파고들어 자신에게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자극에 몸과 정신을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을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듯, 각 개개인들도 세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근원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교류함으로써 더 완전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리뷰한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에서 스티븐 핑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행동이 자아실현이나 자기만족보다 더 큰 성취로 확장될 수 있는지에 집중하라. 당신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하라. 부와 명예만을 중시하면 당신의 두뇌와 실력은 매우 수상쩍게 활용될 것이다. 부와 명예는 사라지지만 당신의 기여는 언제나 남아 있다.’ 정리하자면, 타인에게 기여하는 방식을 배우고 도전해봄으로써 우리는 삶의 목적과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일에 매몰되지 않고,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날 때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175 ~ 176)

 

저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한 방법으로 적절한 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긴장은 가치 있는 목표와 자유의지로 선택한 목표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숨가쁘다는 것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깎아 내릴 필요도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도 머리 한 구석에서는 업무로 인한 긴장상태에 있다면 낙담하지 마라. 당신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고 발전할 역동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니까.

 

 

 

3비극 속에서의 낙관

 

 저자는 인간 삶에 있어서 세 가지 비극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고통, ,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비극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도 우리가 낙관적인 자세를 가지고 삶의 원동력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비극 속에 존재한다.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을 이루어낼 수 있고,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었던 수많은 죄와 실수들로부터 문제를 파악하고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고통에 좌절하고 지쳐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실패로부터 배우고 교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비극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자는 인간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있으며, 그렇기에 현재의 삶은 의미가 없다는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사고의 전환을 노려야 한다. 오히려 일회적인 삶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필자의 사견이지만,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고자 한 바는 인생은 언젠가 마침표를 찍게 되니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즐기고 지금 현실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견해와 주장을 최대한 옮겨보고자 했으나 필자의 미흡한 이해력과 문장 구성으로 더 이상 긴 글을 쓰는 것은 독자들에게도 방해가 될 듯 하다. 위에서 소개했던 여러 문장들 외에도 우리 삶에 교훈이나 지침이 될 만한 내용들을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단락을 소개하고 마치고자 한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잇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