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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에세이

 

 

베스트셀러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제목을 가진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도대체 죽고 싶은데 떡볶이는 왜 먹고 싶다는 걸까?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기에 이렇게 독특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에 책을 단번에 구입했고 술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책은 기분부전장애를 앓고 있는 저자의 치료 기록을 담고 있다. 전문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기록을 통해 저자가 어떤 방식으로 나아지고 있는지, 어떠한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 소개한 바 있는 마르텡 파주의 <완벽한 하루>에 나온 글귀를 시작으로 짧은 감상을 나열해보고자 한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불행하고,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두려움에는 늘 그 만한 이유가 있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이런 감정을 따로 떼어 놓고 볼 수는 없는 법이다.(7)

 

 저자가 가장 좋아하고 공감하는 글귀이자 이 책을 관통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약을 복용하고, 정신과 상담치료를 받는 환자이다. 그녀의 우울감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항상 남을 의식하는 태도. 사랑을 받아도 절망, 사랑을 받지 못해도 절망하는 태도. 외모와 태도를 지적하는 언니. 자신은 못한다는 말만 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엄마 등등. 그런데 그녀의 자존감을 낮추게 한 여러 요소들을 보면 그다지 특별한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수두룩하다. 외모지상주의와 예절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를 비하하고 평가절하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수록 우울함은 심해지고 자존감은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불행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죽고 싶지만 떡볶이를 먹고 싶어>라는 책이 수 많은 책들을 제치고 베스트셀러에 당당히 위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만 우울함을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 이러한 사실이 저자를 비롯하여 삶에서 슬픔과 괴로움을 더욱 크게 느끼는 많은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전문 정신과 의사도 상담가도 아니지만 자존의 모든 영역은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굳게 믿는다. 혹자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과 기준 역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인간관계의 기초는 가정이다. 가정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잦은 비교를 당하며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유년기를 겪으며 자라왔다. 공부를 잘하는 형과 비교당했고, 생기다 만 놈, 키가 작다 등의 핀잔을 들으며 컸다. 아버지가 왕으로 군림하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반항은 용납될 수 없었다. 항상 예절을 강요당했고 밖에선 뛰는 것조차 금지 당했다.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방문을 닫아본 적이 없다. 책상은 언제나 문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판옵티콘에서 감시를 받으며 자랐다. 자존감이 높아질래야 높아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가정에서 사랑, 행복, 안정감은 느끼기 힘들었다. 3자가 우리 가족을 보면 겉보기에는 너무나 완벽하고 균형 잡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 곳곳에 숨어있었다. 아빠와 대화조차 하지 않는 형, 여전히 왕으로 군림하는 아빠, 아빠 말을 순종적으로 따르며 자신의 삶은 포기한 엄마, 그런 엄마를 연민의 감정으로 따르는 형과 나,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를 낮은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 형과 나.

 

 그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가정의 문제들과 이로 인해 형성된 낮은 자존감은 사회로 나아갔을 때 직면하게 되는 인간관계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정에서조차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사랑을 주고 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저자와 비슷한 상태였다. 남들이 나에게 말을 걸면 왜 말을 거는 거지?’라며 의심 섞인 의문을 제기했고, 말을 걸지 않으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왜 말을 걸지 않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건가? 내가 이상한가?’ 등 스스로를 깎아 내리기 일수였다.

 

 특히 연인과의 관계에서 문제는 두드러진다.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분투한다. 동시에 영향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영향관심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주는 만큼 받고 싶어하고, 주는 것만큼 받지 못하게 되면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악순환은 계속된다. 받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감정에 현혹되어, 감정은 사랑이 아닌 집착으로 변하게 된다. 그럴수록 상대방은 떠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 다시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내가 아무리 사랑해줘도, 다 내어줘도 저 사람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구나. 나는 그 정도로 매력 없는 존재구나.’라며 비난하기에 이른다.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대방 위에 군림하여 권력을 행사한다는 느낌마저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관계 규정 방식이다. 사랑 받는데 익숙하지 않고, 주는데 더더욱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집착, 소유와 사랑을 자주 혼동한다. 이렇듯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도 미숙하고 어리석은 태도를 보인다  

 

내가 영향 받고 싶을수록 상대에게 영향을 주려고 노력할 테고, 상대가 반응하지 않으면 더 노력하겠죠. 그러다가 지쳐버리는 거예요. 이것 또한 극단적이고,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거죠. ‘내가 영향을 주어야만 날 사랑하는 거야라는 믿음도 극단적이죠.

좀 더 주도적으로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세요. 지금은 관계가 좁고 삼각형 같아서 마음을 많이 찌르겠지만, 팔각형보다 십육각형이 원에 더 가깝잖아요? 다양하고 깊은 관계가 많아질수록 원처럼 동그랗고 무뎌져서 마음을 덜 찌를 거예요.(101)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걸 완벽하게 해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모든 기준을 달성하기 힘들 정도로 높게 설정한다. 말 그대로 이상향이다. 외모도, 성적도, 여타의 능력들이 모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물론 극소수로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런 초능력자가 될 필요도 그럴 의무도 없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면 된다. 필자는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완벽주의 성향이 심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간단한 인사를 하거나 발표를 하는 자리는 병적으로 꺼려했다.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손과 다리가 떨렸고, 목소리는 양처럼 떨기 일수였다. 아직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리고 말은 점점 빨라진다. 해결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 혹자는 발표 기회를 많이 접하거나, 지하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스피치를 하는 방법을 통해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타인의 시선을 어떻게 의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완벽하게 발표를 할지라도 청자 중 누군가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할 수도 있고, 잠을 잘 수도 있고, 옆 사람과 떠들며 집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문스러운 표정은 나에 대한 관심으로, 잠을 자거나 떠드는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내가 청자로서 행한 행동들에 투영시켜 보았다. 유명인사나 최고의 연설가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을 집중시키고 설득하지는 못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다

 

기준선이 높으면 지금 나의 상태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어요. 자신을 개선해나가야 하는 사람처럼 보는 거죠.(38)

자기 자신을 어떤 틀 속에 맞추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마치 비정상이 되는 듯한 압박감이 큰 거 같아요.(142)

 

타인의 시선은 타인의 시선에 불과할 뿐이다. 나라는 존재는 있는 그대로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달성할 수도 없는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며 나를 평가하고 비교하는 사람들은 내 삶에서 내쫓으면 그만이다. 아직 세상에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들은 많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기 처벌적인 욕구죠.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강력한 초자아가 서 있기 때문이에요.(실제 내가 쌓아온 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더 좋은 걸 차용해서 이상화된 내 모습을 쌓아놓았다는 것),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매번 이상화된 기준에 도달하는 걸 실패하면서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죠. 그렇게 엄격한 초자아가 있으면, 나중에는 벌을 받는 게 만족스러워지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어요. (29)

 

 자신이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행동 방식이 있다.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가 힘든 일을 꾹 참고 이겨낸 사람들을 칭송하고 떠받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급부로 힘든 일을 힘들다 말하는 사회가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힘들고 아픈 걸 숨기도록 강요 받았고 강요하는 사회를 만들어 왔다. 인내는 쓰지만 그 후의 결과는 항상 달콤할 것이라는 말에 속아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고 있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 아픈데 괜찮은 척, 아프지 않은 척,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척. 그게 더 중증환자다. 상처를 감추려고 할수록 상처는 커 보이기 마련이다.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흉터를 삶의 경험과 훈장으로 받아들이는가, 수치스러운 과거의 기억으로 받아들이는가는 본인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나는 늘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고, 그게 자기 연민이라는 것도 잘 알지만 오늘은 나를 달래주고 싶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그래서 몸과 정신이 다양한 방식으로 비명을 지르고서야 깨닫는, 아프다는 명백한 사실도 내 탓으로 만들어버리는 나 자신을. 나는 나에게 늘 과녁이다. 상대에게 달려든대도 찔리는 건 결국 내 몫. 그래서 남을 할퀼수록 나는 더 큰 상처를 입는다. 그렇지만, 어쨌든 내 세계의 중간지점을 만드는 시도도 하고 부작용 증세도 깨달았으니 의미 있는 한 주.(111)

 

 

 저자는 책의 말미에 아직도 우울증을 완전히 탈출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적도 약을 먹은 적도 없다. 하지만 현대인은 누구나 약간의 우울함과 불안함은 가지고 살아가며, ‘자존의 영역에 가장 고민이 많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을 공유하며 따뜻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금씩 깨우치는 중이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듯이, 우리가 진리라고 말해왔던 수많은 가치들도 각기 불완전하다. 어느 것이 정답이고 오답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 관계를 맺고 삶의 방식을 공유하며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할 뿐이다. 저자가 이성이 아닌 보다 감성적인 삶을 추구하는 반면, 누군가는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삶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고, 마음이 움직일 때 글을 쓰고, 그에 맞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늘 사랑의 힘으로 움직이는 사람이고 싶다. 삶의 무수한 여백에 이성적인 힘이 마구 끼어든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빛나는 힘과 여유마저도 잃어버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이성적으로 가난해도 감성적으로 빛나는 사람이고 싶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고 싶다.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에 우위를 따질 수는 없지만, 분명 질감은 다르다. 난 사랑과 감성으로 채워진 질감을 더 세심하게 느끼고 즐긴다. (174)